What is worth Learning in our School 우리는 가치 있는 것만을 교육합니다.

인물/교육/문화

제목 Douglas Lilburn
첨부파일
Douglas Lilburn
- 뉴질랜드 클래식 음악의 대부로 불리는 작곡가
 
유럽음악의 자산에 뉴질랜드만의 소리를 가미한 작품들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대 작곡가 더글러스 릴번(Douglas Lilburn). 뉴질랜드의 목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고국의 풍부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음악으로 만들어낸 그는 뉴질랜드 음악의 지평을 넓힌 음악가로 평가 받고 있으며, 특히 음악을 공부하는 뉴질랜드의 젊은 학생들을 헌신적으로 지도하여 뉴질랜드 클래식 음악계의 후대 작곡가들에게 오래도록 칭송 받아왔다.
 
더글러스 고든 릴번(Douglas Gordon Lilburn)은 1915년 11월 2일 뉴질랜드 북섬 가운데 위치한 드리스데일(Drysdale)에서 태어나 부모가 운영하던 양 목장에서 자랐다. 그는 고향을 ‘야생의 산과 수풀이 있는 천국’이라고 표현하며 자신의 첫 번째 오케스트라 작품인 ‘드리스데일 서곡’(Drysdale Overture)을 쓰기도 하였으며, “마크 트웨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이미지, 짐과 허클베리가 거대한 강을 타고 다니고 밤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고 산책을 하던 그런 곳”이라 회상하곤 했다. 7형제 중 막내였던 그는 바로 위 쌍둥이 형 누나와 5살 터울이 져 형제들이 모두 기숙사 학교에 들어가자 외동처럼 컸다. 부모님이 은퇴하여 왕가누이에 저택을 사 가족이 이사한 후 그의 형들은 모두 왕가누이 컬리지에 다녔는데, 더글러스만 그의 아버지가 특별히 남섬의 와이타키 보이즈 하이스쿨에 입학시켰다. 우수한 성적으로 학업을 마친 그는 1년 일찍 대학 입학 시험에 합격해 캔터베리 컬리지(지금의 캔터베리 대학교)에 들어간다.
 
릴번은 아들의 직업을 고려한 아버지의 권유로 인해 저널리즘 공부를 시작하지만, 곧 이 전공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 역사학과 음악으로 전공을 바꾼다. 젊은 뉴질랜드 작곡가를 후원하는 상을 수상하여 자신의 재능을 입증한 그는 아버지를 설득해 런던의 왕립 음악원으로 유학을 떠난다. 에드워드 미첼(Edward Mitchell)과 켄달 테일러(Kendal Taylor)에게 피아노를, 레지나드 자크(Reginald Jacques)로부터 지휘를 배우고 R. O. 모리스(R. O. Morris)와 랄프 버건 윌리엄스(Ralph Vaughan Williams)에게서 사사받은 그는 특히 랄프 버건 윌리엄스와 돈독한 사제간 우정을 맺었는데 훗날까지도 윌리엄스는 릴번이 뉴질랜드에서 보내주는 마누카 꿀을 너무나 좋아했다고 한다. 1939년에 그는 영국 왕립 음악원에서 코베트 앤 어니스트 파레어(Cobbett and Ernest Farrar prizes)상을 수상하고 폴리 스컬러쉽(Foli Scholarship)을 받았다.
 
전쟁이 일어나자 릴번도 역시 징집되었지만 시력이 너무 나빠 참전하지는 못했고, 대신 공습경보 때 시민을 돕는 ARP 요원으로 자원하여 복무를 마쳤다. 1940년에 뉴질랜드로 돌아가 여동생이 관리하던 목장에서 소의 젖을 짜고 양을 치며 9개월간 머무르던 그는 다음해 웰링턴의 NBS 스트링 오케스트라의 겸임 지휘자로 초청 받아 3개월간 일할 기회를 얻는다. 다시 크라이스트처치로 옮긴 그는 프리랜서 작곡가이자 강사로 일하면서 『크라이스트처치 프레스』에 음악비평을 쓰고 지역 라디오 오케스트라에 피아노, 화성, 지휘를 가르쳤다. 이 시기에 그는 뉴질랜드 예술 운동에 참여해 예술가 그룹과 친분을 나누게 되는데, 특히 시인 알렌 커나우(Allen Curnow), 화가 리타 앵거스(Rita Angus) 그리고 릴번의 음악으로 다섯 편의 셰익스피어 희곡을 무대에 올린 소설가 응가이오 마쉬(Ngaio Marsh) 등과 가까웠다.
 

1946년에는 와이카토 캠브리지에 처음으로 여름음악학교가 열리자 이곳에 초대되어 작곡을 가르쳤는데, 이 음악학교는 점점 유명해져 뉴질랜드 작곡가들을 배출하는 메카로 성장하게 된다. 1949년까지, 그리고 1951년에도 릴번은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47년에 그는 빅토리아 대학교에 신설된 음악과에서 파트 타임으로 화성학을 가르치는 강사가 되었고, 2년 후에는 전임강사가 되었으며 1963년에 부교수, 1970년에 전임교수가 되었다. 릴번이 빅토리아 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한 바로 그달에 국립 오케스트라(현재의 뉴질랜드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첫 번째 연주회를 열게 되는데, 이 오케스트라단이 릴번이 작곡한 ‘섬들의 노래’(Song of Islands)를 자신들이 연주할 곡으로 정해 릴번은 대중들에게도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1963년에 잠시 빅토리아 대학을 떠나 독일과 영국을 여행하고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전자음악 스튜디오에서 몇 달간 일한 그는 뉴질랜드로 돌아와서 전자음악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소개한다. 1966년에 빅토리아 대학에 전자음악 스튜디오가 생기자 이곳에서 계속해서 작업하며 새로운 곡들을 작곡했는데, 뉴질랜드나 호주에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종류의 음악이라 그는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이 시기부터 그는 일렉트로어쿠스틱 음악에 주력하면서 뉴질랜드의 풍경에 영감을 얻은 작품들인 ‘호수와 강의 음악풍경’(Soundscape of Lake and River), ‘회전목마’(Carousel)을 선보인다. 그러나 80년대에 이르러서는 청력이 약화되어 전자음악 쪽의 작곡을 그만두었다.
 
말년에 이르러 릴번은 웰링턴에 있는 한적하고 나무들로 둘러 싸인 자신의 집에서 정원을 가꾸고 피아노를 연주하며 살았다. 생애 마지막 몇 달간 그는 지인들에게 자신이 이제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머무르던 병원을 떠나 집으로 돌아갔고, 2001년 6월 6일, 몇 잔의 와인을 즐긴 후 평화롭게 숨졌다. 제자들에게 관대하고 양심이 있는 스승이었고 그렇기에 뉴질랜드의 모든 작곡가들은 자신들이 받은 릴번의 특별한 격려와 지지에 대해 말하곤 한다. 1969년에 오타고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릴번은 1978년에는 뉴질랜드 작곡가 연합(CANZ)에서 감사표창장을, 1988년에는 뉴질랜드 훈장을 받아 공로를 치하 받았다.
 
릴번은 1967년에 D. F. 맥켄지(D. F. MacKenzie)와 공동으로 와이테아타 프레스 뮤직 에디션스(Waiteata Press Music Editions)를 설립해 뉴질랜드 작곡가들의 작품을 출판하였고 현재는 잭 바디(Jack Body)가 감독하고 있다. 릴번은 또한 뉴질랜드 음악의 성장 발전을 위해 개인 자금을 모아 1980년에 릴번 재단(Lilburn Trust)을 웰링턴 알렉산더 턴불 라이브러리에 설립하였으며, 현재 릴번 레지던스 재단(Lilburn Residence Trust)은 릴번이 예전에 소유했던 에스코트 거리 22번지의 건물을 구입하고 뉴질랜드 음악학교와 뉴질랜드 주재 작곡가들에게 장소를 제공하고 있다.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