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is worth Learning in our School 우리는 가치 있는 것만을 교육합니다.

인물/교육/문화

제목 Sir Edmund Hillary
첨부파일

 

Sir Edmund Hillary (1919~2008)

 

- The man who took New Zealand to the top of the world -

지난 2008111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에드먼드 힐러리경은 1953년 5월 29일 세계 최초로 지구상의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은 뉴질랜드 출신의 산악인이자 탐험가였다.힐러리경은 에베레스트를 최초로 오른 사람으로서만 아니라 겸손과 희생, 그리고 끊임없이 계속된 도전 정신으로 뉴질랜드 국민들만이 아닌 전 세계인들에게 큰 인상을 남긴 영웅이였다.

힐러리경이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직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에드먼드 힐러리에게 `기사'(knight) 작위를 수여하며 그의 업적을 칭송 했는데, 힐러리경은 에베레스트 정복에 만족하지 않고 4년 뒤인 1957년에는 뉴질랜드 탐험대를 이끌고 남극에 원정, '스콧 기지' 과학 연구센터를 설립했으며, 이듬해 1월에는 개조 트랙터를 몰고 다시 남극원정에 나서 남극점을 밟는데 성공했다.

그는 특히 지난해 1월에는 '스콧 기지' 설립 50주년을 기념해 87세의 나이로 손자 데이비드 헤이먼과 함께 남극을 다시 방문하는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힐러리경은 에베레스트를 최초로 오른 사람으로서만 아니라 겸손과 희생, 그리고 끊임없이 계속된 도전 정신으로 뉴질랜드 국민들만이 아닌 전 세계인들에게 큰 인상을 남긴 영웅으로 기억된다. 세계 최초 에베레스트 정복 당시 셰르파로 그의 곁을 지킨 네팔의 텐징 노르게이 (1986년 작고)와의 인연으로 힐러리경은 노르게이의 고국인 네팔에 세르파 족을 돕는 히말라얀 재단을 설립하고 자신이 각종 강연에서 받은 돈을 비롯해 인세, 로열티 등 많은 수입이 있었지만 평생 지극히 검소하게 살면서 대부분의 수입을 재단에 기부하고 학교와 병원, 진료소, 다리와 도로, 공항을을 짓는 등 셰르파족을 돕는 데 일생을 바쳤으며 네팔 정부는 2003년 에베레스트 정복 50주년을 기념해 그에게 명예시민증을 수여했다.

2007년 1월 남극대륙을 방문하고 최근에도 네팔을 다녀 오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다 지난 4월부터 건강이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의 사망소식에 헬렌 클라크 뉴질랜드 전 총리는 즉각 그의 사망 사실을 직접 발표했으며, 호주와 영국을 비롯한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조문 성명이 나왔다.

 

 

헬렌 클라크 뉴질랜드 전 총리는 "힐러리 경은 자신이 '평범한 능력을 가진 펴범한 뉴질랜드인'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에베레스트를 정복했을 뿐 아니라 결의와 겸손, 관용의 삶을 산 영웅"이라고 평가했다.

 

줄리아 길라드 호주 부총리는 호주인들 또한 힐러리 경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면서 "힐러리 경의 이름은 모험, 꿈과 동의어"라고 말했다.

힐러리 경의 에베레스트 등정 당시 영국 더 타임스의 신예 기자로 등정 성공 사실을 처음 세상에 알렸던 잰 모리슨(82)도 힐러리 경의 사망 소식에 눈물을 흘리며 위대한 그의 삶 가운데서도 가장 자신을 감동시키는 것은 인도적 봉사라고 말했다.

22일 오클랜드 St. Mary's 교회에서 국장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는 세계 각국의 고위 인사들을 포함한 수백명의 조문객들이 참석했고 그의 장례식은 전국에 생방송으로 중계가 되었다. 특히 힐러리경이 생전에 많은 도움을 줬던 네팔에서는 뉴질랜드 국민들 못지 않은 추모 열기가 이어지고 있으며, 불교식 추모제가 거국적으로 거행되기도 했다.

생전에 이미 뉴질랜드 지폐의 모델이기도 했던 그는 뉴질랜드와 전세계 사람들의 영원히 위대한 영웅으로 기억될 것이다.

 

     
 
 
 
 
 
뉴질랜드 출신의 산악인 에드먼드 힐러리. 1953년 인류 최초로 에베레스트 산 정산에 오른 사나이다.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초등(初登) 60주년을 맞아 극한의 환경 속에서 불굴의 도전 정신을 보여 준 에드먼드 힐러리를 조명해 보았다.
 
1953년 5월 29일 오전 6시 30분. 에베레스트 산 해발 8504미터 지점.
에드먼드 힐러리는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와 함께 텐트를 나섰다. 정상을 365미터쯤 남겨 놓은 지점.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산의 최초 등정을 목표로 한 힐러리와 텐징 앞에는 가장 위험한 구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그들은 지난 이틀 내내 세찬 돌풍을 피해 캠프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날이 밝자 가능성이 엿보였다. 힐러리는 2003년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기상 조건이나 강설로 인해 정상 도달이 어려울 수 있다는 건 늘 염두에 두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날은 아침부터 바람이 잠잠하더군요. 우리가 해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이르는 마지막 구간은 얼음, 눈, 바위로 뒤덮여 험난하기로 유명하다. 1924년 유명 산악인 조지 맬러리와 앤드루 어빈이 목숨을 잃은 지점도 바로 그곳이었다. 맬러리와 어빈은 제 2차 세계대전 이전에 에베레스트 정복을 시도한 영국 등반 팀의 일원이었다.
1920년대 영국은 티베트 정부로부터 에베레스트 원정 독점권을 부여받은 상태였다. 때문에 영국인 외에는 누구도 에베레스트의 최초 등반자가 될 수 없을 거라 자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티베트 정부가 외국인 입국을 금지하면서, 정상에 유니언잭을 꽂으려 했던 영국인들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이후 1951년 네팔 정부는 한 해에 오직 한 원정대만 에베레스트에 오를 수 있도록 허용한다.
1951년 등정에 실패한 영국 팀은 1952년 정상으로 향하는 스위스 팀의 행군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스위스 팀도 정상을 약 244미터 남겨둔 채 발걸음을 돌린다. 이듬해 다시 기회를 잡은 영국 원정대는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성공하리라 굳게 다짐했다.
원정대장으로 임명된 존 헌트는 대대적인 조사를 거쳐 우수한 장비로 무장한 사상 최강의 원정대를 꾸렸다. 대원 수만 해도 셰르파, 짐꾼을 포함해 무려 400명. 그들의 첫 번째 임무는 쿰부 빙폭(氷瀑)을 지나 3톤 분량의 생존 물자를 나르는 것이었다. 다음에는 1219미터 높이의 빙벽을 타고 사우스콜까지 올라갔다. 힐러리를 비롯한 등반가들이 길을 텄다. 빙벽을 깨서 계단을 만들면, 짐꾼들이 계단을 타고 산머루까지 물자를 수송하는 식이었다.
준비 작업을 마친 후, 등반가들은 두 팀으로 나눠 정상을 공략하기로 했다. 힐러리는 텐징과 한 조를 이뤘다. 이번이 일곱 번째 등정 시도였던 텐징은 출발 전 지인들에게 "이번에도 정상을 못 밟으면 차라리 죽을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전설의 시작
 
힐러리는 1919년 7월 20일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태어났다. 투아카우라는 시골 지역에서 자랐지만 등산에 대한 관심은 16세 때 간 수학여행에서 싹텄다. 루아페후 산으로 스키 여행을 갔는데, 힐러리는 훗날 그때를 이렇게 회상 했다고 한다. "철길, 나무 위, 시선을 돌리는 곳 어디에나 눈이 쌓여 있었죠. 사실 눈을 처음 보았어요. 그때부터 눈과 얼음, 그리고 산에 열정을 품었던 것 같습니다."
힐러리는 1939년 뉴질랜드 남섬의 올리비어 산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산악 인생에 나선다. 대학을 중퇴하고 여름이면 아버지의 양봉 농장에서 일하고 겨울에는 등산을 했다. 1943년에는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뉴질랜드 공군 소속 수상비행기 항법사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런데 1945년, 피지와 솔로몬 제도로 파견됐을 당시 사고로 심하게 화상을 입어 뉴질랜드로 송환되었다. 부상에서 회복한 힐러리는 뉴질랜드의 남알프스 산맥을 오르며 다시 등반을 시작했다. 1951년에는 히말라야 산맥 가운데 6000미터급 봉우리 다섯 개를 등정했다. 그의 활약은 세간의 주목을 받았고, 곧 영국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합류했다.
힐러리와 텐징은 원정대의 두 번째 정상 등반조였다. 두 사람이 출발하기 이틀 전, 톰 버딜런과 찰스 에번스로 이뤄진 첫 번째 등반조는 정상 91미터 지점까지 접근했지만 안타깝게도 산소통 관리에 실패해 발걸음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힐러리와 텐징이 2차로 등정에 나섰다. 아침 9시 무렵 사우스서밋에 이르렀다. 예상은 했으나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가까스로 올라가 정상을 겨우 60여 미터 남긴 지점, 이들에게 마지막 장애물이 나타났다. 12미터 높이의 가파른 암벽이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힐러리는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그는 '침니', 즉 암벽의 좁게 갈라진 틈을 발견하고 여기에 쐐기를 박아 벽을 넘었다. 훗날 이 암벽은 '힐러리 스텝'으로 불리게 된다. 그리고 오전 11시 30분, 마침내 힐러리는 에베레스트 정사에 발을 디뎠다. 그는 세계의 정상에 서서 티베트 고원과 지구 표면의 만곡을 내려다보았다. 텐징과 함께 위대한 발자국을 남긴 것이다.
"정상에 올랐을 때 엄청난 희열이나 기쁨에 사로잡히진 않았다. 폴짝폴짝 뛰거나 만세를 부르지도 않았다. 무척 피곤한 상태였고, 오히려 안전하게 하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의 기분은 그냥 일종의 '충족감'이었다. '아, 결국 해냈군' 그런 생각 뿐이었다." 힐러리의 말이다.
그들은 정상에서 사진을 찍은 후 하산했다. 베이스캠프에서는 원정대원들이 뜨거운 환호로 두 사람을 맞이했다. 등정 소식은 6월 2일에야 런던에 전해졌다. 여왕의 대관식 바로 전날이었다. 힐러리는 기사 작위를 받았고, 고국 뉴질랜드에서 영웅으로 불리며 대대적인 환영을 받는 등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2008년에 타계한 힐러리가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데에는 그만의 독특한 기질이 큰 역할을 했다. 두려움을 발판으로 더욱 전진하는 도전 정신 말이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두려움으로 인해 무력해지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최대한 이용하면, 생각의 한계를 뛰어넘어 자신의 역량을 한층 더 발전시킬 수 있다. 두려움이야말로 나를 자극하는 원동력이었다."
 
 
오클랜드
 
에드먼드 힐러리는 1919년 뉴질랜드 최대 도시인 오클랜드에서 태어났다. 출생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이 이사를 갔지만, 힐러리의 삶은 오클랜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오클랜드에서 학교를 다녔고, 기차를 타고 통학하는 동안 모험 서적을 읽으며 도전과 모험을 꿈꿨다. 가족의 양봉업을 돕기 위해 중퇴하기 전까지 2년 동안 오클랜드 대학에서 과학을 공부했다.
힐러리는 오클랜드가 자랑하는 영웅이다. 그의 장례식은 오클랜드 파넬 지역의 세인트메리 성당에서 국장(國葬)으로 치러졌다. 오클랜드 일대에는 이 위대한 에베레스트 등정가의 이름을 딴 건물과 단체가 여럿 있다. 그 중 상당수는 그가 생전에 꾸준히 후원한 곳들이다.
오클랜드 남쪽으로 약 50킬로미터 지점에는 언덕과 푸른 방목장이 펼쳐진 투아카우 마을이 있다. 힐러리가 유년 시절을 보낸 곳으로, 그는 이 마을에 살면서 대자연과 사랑에 빠졌다. 노령의 마을 주민들은 아직도 힐러리에 대한 애틋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힐러리 트레일
 
등반가 힐러리의 발자취를 따라 모험심을 길러 볼 수 있는 70킬로미터 길이의 도보 여행로. 오클랜드 주심지에서 서쪽 25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아라타키 방문자 센터에서 시작해, 도시를 에워싼 연안 지대를 따라 굽이굽이 펼쳐지는 트래킹 코스다. 검은 모래 해변, 높은 산, 무성한 삼림 등 다채로운 자연 풍경이 펼쳐진다. 이 트레일은 힐러리 본인이 현지 당국과 함께 논의해 추진하려던 아이디어. 비록 그의 사후에 개장됐지만, 힐러리의 뜻이 충실하게 반영됐다고 한다. 코스 내 와이타케레 레인지는 힐러리가 등반에 앞서 훈련을 했던 곳이다.
아나타와 해변은 1975년 힐러리의 부인과 딸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후 그와 가족이 머물렀던 곳이다. 피하는 그의 부인이 이곳에 머물다 남편의 에베레스트 등정 소식을 맨 처음 들은 곳이다. 코스 내내 뉴질랜드 북섬 특유의 숨 막히는 풍광이 펼쳐지지만, 가파른 산길이나 발목까지 빠지는 진흙 길, 다리가 없는 강 등 모험심을 자극하는 요소가 가득하다.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