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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William Pick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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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Pickering 1910~2004

Birthplace: Wellington

William Pickering is famous for his contribution to space science, He became a central figure in the American space race with the launch of Explorer 1, the first successful American satellite. Pickering also contributed greatly to human understanding of the wider galaxy through his work at the Jet Propulsion Laboratory (JPL) and National Aeronautic and Space Administration (NASA) with successful rocket launches to Venus, Mars and the Moon.

The New Zealand Herald

 

 

밤 하늘의 별을 쳐다본다. 수많은 별들이 촘촘히 박혀있는 뉴질랜드의 밤하늘은 말 그대로 환상이다. 사람의 때가 묻지 않은 자연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더욱 더 그렇다. 외딴 바닷가에서 잔잔한 파도소리를 등지고 바라볼 수 있다면, 정말 축복이다.
100여년 전 한 소년이 있었다. 이름은 윌리엄 피커링, 1910년 웰링턴에서 태어난 이 소년은 50년 후 세계과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인간의 삶의 영역을 지구에서 우주로 넓힌 장본인이 바로 윌리엄이었다. 밤 하늘의 뭇 별들을 보며 꿈을 키워왔던 어린 소년이 ‘과학계의 빛나는 별’이 된 것이다. 그의 삶을 훑어본다.
 
노벨상 수상자가 다닌 초등학교 다녀

윌리엄은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여위웠다. 자연스럽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고 있던 웰링턴 인근의 남섬 말보로로 이사를 갔다. 윌리엄은 그 곳 헤브록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 학교는 뉴질랜드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어네스트 러더포드가 졸업한 학교였다. 학교 분위기가 좋았던 탓일까? 그후 그는 어네스트 러더포드에 못잖은 세계적인 과학자 반열에 오르게 된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윌리엄은 다시 웰링턴으로 돌아갔다. 약사인 아버지가 그를 웰링턴 칼리지 기숙사에 집어 넣었다. 그는 거기서 인생의 멘토를 만났다. 수학선생이었던 찰스 기포드였다. 찰스는 윌리엄에게 처음으로 천문학을 소개해 주었으며, 과학실험실을 만들어 윌리엄과 함께 연구에 매진했다. 이들 사제는 대형망원경을 통해 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관찰하며, 꿈을 심어주고 또 꿈을 키워나갔다.

캔터베리대학에서 1년을 보내던 중 그는 미국에 있는 삼촌으로부터 초청장을 받았다. ‘더 넓은 땅에 와서 제대로 공부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간 곳이 바로 캘리포니아공과대학(Cal Tech이라고 불림)이었다. 이 곳은 순수 및 응용과학 분야에서는 최고 중 하나인 사립대학이었다.

윌리엄은 이 곳에서 전기공학 전공의 학사와 석사, 그리고 박사(물리학) 학위를 줄줄이 꽤찮다. 1946년 윌리엄은 칼텍의 교수가 됐다. 한때 윌리엄은 뉴질랜드로 돌아간 적이 있었다. 가급적이면 고국에서 제대로 된 직업을 찾아 살고 싶은 소박한 심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뉴질랜드 사회는 그를 세계적인 과학자로 키우려고 그랬는지 비집고 들어갈 틈을 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미국에 정착한 그는 그후 탄탄대로의 과학자 세계의 길을 걸어가게 됐다.

1944년 윌리엄은 교수생활을 하면서 제트추진연구소(Jet Propulsion Laboratory)에 몸을 담았다. 파사데나이 있는 이 연구소는 나중에 미국우주산업의 중요한 거점이 됐다. 윌리엄은 그 곳에서 주로 무선조종에 관한 연구에 몰두했다. 12년 후 그는 연구소의 총책임자가 됐다. 미국, 영국 등에서 온 기라성같은 학자들을 제치고, 미국 우주산업의 미래를 짊어진 장이 된 것이다. 윌리엄은 그 곳에서 1976년까지 총책임자로 일하면서 밤 하늘에 빛나는 별 못잖은 찬란한 업적을 쌓아 나갔다.
 
정치인에게 우주산업 중요성 역설

윌리엄은 단순히 학자로서의 길만 걸은 아니라 정치인들과 군사전문가들에게 우주산업의 중요성을 역설해, 마침내 미국이 이 부분의 최고로 자리잡는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냈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미국은 어쩌면 러시아(구 소련)보다 우주산업 분야에서는 한참 뒤처지는 사태가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윌리엄의 진가는 1958년 1월에 드러났다. 4개월 전(1957년 10월 4일) 러시아는 세계최초로 인공위성을 우주에 쏟아 올렸다. ‘스푸트니크’(Sputnik)라 불리는 이 인공위성 때문에미국의 자존심은 땅으로 추락했다.

당시만 해도 미국과 러시아는 동서냉전체제의 한 복판에 있었다. 특히 군사적인 분야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물밀 싸움이 진행중이었다. 그러던 차에 창공을 먼저 제패한 러시아를 바라보는 미국 시민들의 불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불안감을 일시에 해결해 준 사람이 바로 윌리엄 피커링이었다. 윌리엄이 주축이 된 제트추진연구소는 다음 해 1월 31일 ‘Explorer 1’호를 우주 상공으로 뽐나게 쏘아 올렸다. 이를 계기로 미국은 러시아를 제치고 우주산업에서 한 발 앞서가는 발판이 되었다.

미국 사람들에게 ‘로켓 맨’으로 불렸던 윌리엄은 그 후 20여년간 우주산업의 새 마당을 넓혀 나가는데 진력했다. 제트추진연구소는 우주탐사의 대명사가 된 것이었다. ‘Explorer 3’호는 ‘밴엘런 대’(Van Allen Belt,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방사능을 가진 층)를 발견했으며, 1962년에는 화성 및 금성 탐색용인 무인우주선 ‘Mariner 2’호를 발사해 금성의 온도를 처음으로 기록하는 과학사의 큰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3년후인 1965년 7월에 지구를 떠난 ‘Mariner 4’호는 228일간 우주 상공을 일주하면서 화성을 지날 때 찍은 22개의 영상이미지를 통해 ‘화성이 생명체의 서식지'라는 일반 사람들의 생각을 시정해 주었다. 다시 말해 화성은 죽은 행성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시켰다는 말이다.
 
인간의 달 착륙에 이끌어 내

1969년 7월 20일, 우주탐험역사에서 결코 빼 놓을 수 없는 날이다. 미국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이 지구가 생긴 이래 끊임없이 신비스럽게만 여겨졌던 달에 인류 최초의 발자국을 새겨 놓은 것이다. 물론 이 역사적인 사건 뒤에는 윌리엄 피커링 같은 과학자의 노고가 숨어 있었다.
윌리엄은 공식적으로 제트추진연구소를 떠나기 전까지 수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등 우주탐사의 총책임자로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해냈다.

연구소를 그만둔 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2년간 교수로 일하기도 한 윌리엄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폐목재를 재사용할 수 있는 팔레트를 만드는 회사를 설립했다.
윌리엄은 세계적인 시사잡지 ‘타임’에 두 번이나 표지인물로 등장하는 영예를 안았다. 정치가가 아닌 과학자로서는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1975년에는 미국 대통령 포드로부터 과학상을 받았다.

윌리엄은 1941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기는 했지만, 그가 뉴질랜더로서 세계 역사에 끼친 공을 충분히 인정해 1976년에는 기사 작위를 수여했으며, 2003년에는 뉴질랜드 최고영광인 ‘The Order of New Zealand’를 받았다.
2004년, 9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윌리엄 피커링에 대해 제트추진연구소의 소장인 찰스 엘라치는 이렇게 말했다.
“피커링 박사는 미국 우주탐험 역사의 거장 중의 거장이었다. 미국을 우주의 주역이 되게 한 공은 그의 탁월한 리더십 때문이다. 달과 행성의 모습을 세상 사람들에게 잘 알려준 그의 업적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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